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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철학’으로 분류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재미있는 서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19세기 프랑스의 교육자였던 조셉 자코토라는 인물이다. 그는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네덜란드의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학생들에게 불문학을 가르치는 강의를 맡게 된다. 문제는 자코토 자신이 네덜란드어를 조금도 몰랐다는 점인데, 따라서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불어불문학을 직접 가르칠 수는 없었고, 그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되어 있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을 건네주며 읽고 외우라고, 통역을 통해 지시했다.
예상과는 달리 이 실험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자코토는 이러한 우연한 경험을 통해 당시에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던 교육 체계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의심하게 된다. 그 전제란, 교육의 목표가 설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지식을 잘 전달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인데, 자코토는 이러한 교육관이 지능의 위계를 나누어 우월한 지능이 열등한 지능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불평등한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바보 만들기”에 맞서 자코토가 내세운 교육관은, 모든 사람의 지능은 평등하며 학습 성과의 차이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교육의 목표는 학습자의 의지를 강화하는 데 있다는 골자로 이루어져 있다. 자코토의 교육관에 따르는 교육자는 결코 학습자에게 지식을 설명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만인의 지능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며, 학습자가 학습 의지를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점검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이러한 교육관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놀라운 결론이 도출되는데, 교육자가 가르칠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학습자가 의지를 잘 발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것은 학식이 아니라 관심과 주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한 스승”의 교육 방법이다.
앞에서 말한 우연한 성공 외에도 자코토는 이 방법으로 몇 번이나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 혁명적인 방법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코토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배반한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자 했던 진보적인 계몽주의자들이었다(애초에 보수왕당파는 이런 평등주의적 사상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들은 자코토의 사상에서 지능의 평등에 관한 부분을 빼고, 그의 사상을 하나의 교육학적 방법론으로 축소시킴으로써 그렇게 했다. 자코토의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했고, 그가 죽은 뒤 곧 망각되었다.
랑시에르가 이 책을 쓴 의도는 명확하다. 잊혀진 자코토의 가르침을 발굴하여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책의 서술 스타일 자체도 어디까지가 자코토의 말이고, 어디서부터가 랑시에르의 말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도록 쓰인 부분이 많다. 그만큼 랑시에르가 자코토의 생각에 전면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따라서 이하에서 내가 ‘저자’라는 말로 자코토와 랑시에르를 동시에 지칭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읽었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읽었다. 그 사이에 인터넷에는 이 책에 대한 많은 서평과 감상이 올라왔는데, 그 내용들은 크게 두 가지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우선 독자들은 이 책이 보여주는 문제제기의 급진성에 놀란다. 학교를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파악하는 좌파적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조차도 이 책은 도발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좌파적 대의에 맞게 교육의 체계와 내용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설명의 논리를 버리지 못하는 한, 그것은 여전히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실제로 80년대 프랑스의 우파적인 교육 정책 노선뿐만 아니라, 부르디외 등의 사회학에 기반을 둔 좌파적인 노선까지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자코토와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의 관계가 20세기에 그대로 반복되는 셈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조차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계몽주의자들과 크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좌파적 대의에 충실하려는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 중요한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사회적 불평등을 철폐하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는 이런 신선한 문제제기가 활로를 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독자들은 지능의 평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타고난 지능의 차이가 없을 리가 있겠냐는 것이다. 저자는 지능의 차이는 부정하지만 지능의 발현의 차이는 인정하는데,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의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둔재와, 학습 의지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 비해 월등한 성취를 보여주는 천재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런 경우들도 의지의 차이로 설명되는가? 그렇다면 둔재는 겉보기와는 달리 의지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 않는 것이고, 천재는 남모르게 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이처럼 명백히 예상되는 반론에 맞서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몇 가지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윤곽선만 그린 뒤, 아래에서 각각에 대하여 상론할 것이다. 1)언어를 설명하는 또 다른 언어는 없다. 즉, 메타언어는 없다. 2)선천적인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은 없다. 3)물질로 이루어진 사물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지능은 비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데카르트주의적 이원론. 4)지능의 평등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 반대(지능의 불평등)도 역시 증명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지능의 평등을 택하는 것이 더욱 좋은 결과를 낳는다.
1)에 대하여: 책에 쓰여 있는 언어와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는 다른 언어가 아니다. 어떤 매체로 되어 있든 언어를 이해할 때는 해석의 노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언어와 무관한 실재와 비교하여,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말해줄 수 있는 근본적으로 우월한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이를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그런 우월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해 보자. 신 같은 존재 말이다. 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옳은지 그른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너무도 당연하므로 우리의 관심사일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특정한 생각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 하고, 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한다. 신이 인간에게 어떤 것을 알려주기를 원한다면, 신 역시도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 인간의 이성에 적합한 형식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신 자신은 답답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이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말을 듣는 인간은 여전히 해석의 노력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모습은 여러 신화들에 나타난다. 물론 신은 자신이 총애하는 극소수의 인간에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특별한 방법(계시)으로 무언가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계시는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없고, 계시를 받은 선지자의 말 역시 우리가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신이 원한다면 모든 인간에게 계시를 내려줄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인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런 존재는 지금의 우리와 무관하다.
메타언어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메타언어의 부재는 소박한 진리대응설을 반박하는 함의도 있고, “해석의 갈등”을 강조하는 함의도 있으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이해 지평이 궁극적이라는 함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능의 평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과, 인간들 중에는 나면서부터 말을 더 잘 이해하고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혀 같지 않다. 모든 인간이 달리기를 할 수 있지만, 타고난 신체능력이 같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지능의 평등은 후자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2)에 대하여: 선천적인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 지능에 있어서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차이를 식별해낼 수 없다는 뜻이라면 동의한다. 지능의 형성에 유전과 환경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둘의 영향력이 각각 어느 정도인지 분리해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은 이제 학계의 정설이다. 대중들 중에서도, 지능 검사가 선천적인 지능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전에 비하면 훨씬 적어졌다. 그러나 지능의 차이에서 선천적인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측정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선천적인 지능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지능의 차이에 자연적인 부분이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고 알려진 몇몇 근거들이 있다.
첫째, 비슷한 사회적 환경에 놓여 있는 집단 내에서도 지능 검사 결과는 언제나 정규분포곡선(종형 곡선)을 나타낸다. 둘째, 일란성 쌍둥이를 이용한 실험 결과, 유전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셋째, 쥐를 이용한 실험 결과 동일한 유전자형을 갖는 것들로 분류하여 동일한 미로 테스트를 시행하면 그 성적은 유전자형의 분류와 비슷하다.
물론 이런 실험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 실험들이 정말로 의도한 것을 증명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지능을 결정한다는 식의 결론이 나온다면 더 이상의 이의제기가 불가능하겠지만, 유전자와 지능 사이에서 그런 대응관계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능의 차이에 자연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런 생리학적, 심리학적 접근 방식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지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과연 불합리한 믿음인가? 그것은 합리적인 세계관의 일부인가, 아닌가? 등등. 이 물음에는 3)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4)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 대답할 것이다.
3)에 대하여: 무지한 스승의 실험은 온갖 영역, 과목으로 확장되는데, 미술을 가르칠 때에는 성과가 좋지 않았다. 저자는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해방된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 그림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고, “그래, 나도 화가다!”고 외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과장이다. 애초에 네덜란드 학생들의 프랑스어 학습 성취도가 기대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이후에 무지한 스승의 실험이 결과에 있어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더라면, 저자는 자기의 신념을 재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생각에, 무지한 스승의 미술 교육은 아마도 화가가 아니라 미술 평론가를 길러내는 데 적합했을 것 같다.
저자는 이 사례를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부터 저자의 데카르트주의적 이원론이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파고들어 볼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동일한 인간 지능의 산물이라면, 미술 작품 역시 그러할 텐데, 왜 어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어떤 인간이 도달한 경지에 한참 못 미치는 일이 벌어지는가? 문학을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는 이 정도의 차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영역에서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서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그림 실력을 보여준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유치한 그림을 그릴 때, 이미 완벽히 사실주의적인 데생을 해낸다. 저자의 이원론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미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사물의 형태를 포착하고 재현하는 월등한 능력이, 일종의 육체적인 능력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남들보다 좋은 시력이나 운동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술 역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정신을 사용하겠지만, 미술은 정신뿐만 아니라 또한 육체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난 능력의 차이 같은 것이 관찰되는 것이다.
위의 추론은 일반화될 수 있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사용하는 모든 인간 활동의 영역에 있어서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저자는 이 능력이 순수한 지능이 아니라 지능과 육체적 능력이 결합된 어떤 능력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나의 진정한 의문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육체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이라는 것이 있는가? 이원론자는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유 활동을 그 예로 들 텐데, 저자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들이 오늘날 점점 더 지배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체화된 인지 이론은 우리의 마음, 언어, 개념 체계가 신체에 근거하고 있다는 확고한 증거들을 대단히 많이 제시하고 있다. 이 모든 방대한 증거들에 맞서, 순수한 정신적 실체를 말하는 형이상학을 고수할 것인가?
게다가 데카르트주의적 이원론은 이미 그 당시부터 문제가 많은 이론이었다. 서로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언제나 주된 논란거리였다. 이 문제를 모르고 있을 리가 절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문제를 주의 깊게 다루지 않는다. 저자는 정신적 속성을 두뇌의 속성으로 환원하려는, 어떤 점에서는 골상학이나 다를 바 없는 유물론을 비판하지만, 유물론으로 묶이는 학설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오늘날 그런 식의 조야한 유물론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자코토는 몰라도 현대 철학자인 랑시에르는 이 문제를 전문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었어야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4)에 대하여: 이제, 지능의 평등도 지능의 불평등도 증명할 수 없으므로, 지능의 평등을 가정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자는 저자의 주장에 대한 입장을 밝힐 준비가 되었다. 지적 활동이라는 것도 유기체의 하나인 인간이 수행하는 여러 활동들 중 하나일 뿐이고, (지능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에 어떤 능력이 요구된다면, 그 능력은 인간의 다른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타고난 개인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바로 앞의 문장에 쓴 ‘생각하다’는 단어는 다소 오도적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일련의 추론 과정을 통해 선천적 지능의 차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의 주장은 오히려 선천적 지능의 차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합리적 세계관의 일부이고, 그런 점에서 반성을 거쳐서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보다 힘이 센 인간이 있고, 약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런 기초적인 직관들 중 일부는 나중에 근거 없는 통속 심리학의 일종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지지하는 명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수많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들과 잘 어울리고, 우리의 상식에도 부합하면서, 신비한 형이상학적 실체를 끌어들이지 않는 세계관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도 이미 문제가 많은 이원론을 택할 것인가? 다만 전자를 택하는 경우, 무지한 스승의 방법이 다른 분야에 비해 유독 언어 습득 영역에서만 학생별로 고르게 큰 성공을 거둔 이유를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는 저자에 맞서서 지능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논변들을 펼치려니, 저자가 비판한 진보주의적 계몽주의자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 그러나 선천적 지능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반동적인 함축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계몽주의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매우 편파적이다. 선천적인 지적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민주적인 정치체를 구성함에 있어서는, 지적 능력을 포함한 어떤 능력의 차이도 각 구성원들이 가지는 권리의 동등성을 수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계몽주의가 말하는 평등의 원리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능이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평등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반적인 계몽주의의 한계는 이런 평등주의가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것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모든 인간이 권리상 평등할지라도, 권력의 불평등이 심하다면 권리상의 평등 역시 공허한 수사가 되기 쉽다. 신분제가 폐지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불평등은 경제 구조에서 행위 주체가 차지하는 위치, 즉 계급의 차이에 따라 노골적으로 전개된다. 이런 현실로부터 계급의 철폐라는 좌파 정치의 목표가 자연스럽게 도출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단에 따라 세부적인 입장들이 나뉜다.
저자 역시 이런 대의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능의 평등에 대한 학설에 저자 특유의 사회 철학적 입장이 더해진 결과, 전통적인 좌파와 저자 사이의 차이는 실천적인 방향에서 꽤 크게 나타난다. 저자는 ‘사회명목론’(보통 대륙적인 이성주의보다는 영국적인 경험주의와 잘 어울린다고 알려진)을 아주 분명하게 표방하고 있다. 즉, 그는 오직 개인만이 실재성을 가지며,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주체이고, 개인보다 큰 단위, 사회는 비실재, 허구라고 본다. 특히 사회는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유포하는 나쁜 곳이다. 물론 보다 좋은 사회와 나쁜 사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성적일 수 있는 것은 개인뿐이기 때문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수의 해방된 개인들을 탄생시키는 것이 선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으로 해방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지한 스승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제도화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가정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어쩌면 유일하게 생각하는 실천은 가정교육이다. 가정에서 부모가 무지한 스승의 방법에 따라 자녀들을 해방된 주체로 길러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은 전통적인 좌파에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으로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사회명목론을 직접 논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몇 가지 물음을 던져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는 인간이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관념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공교육이라는 개선된 형태의 “바보 만들기”가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데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회와 아주 약간만 다른 사회를 상상해 보자. 그 다른 사회에서는 고등학교 정규 교육 과정에 『무지한 스승』을 읽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별로 비현실적인 가정이 아닌데, 프랑스 고교 철학 교과서는 이미 지능의 차이에 대하여 한 장을 할애하고 있으므로, 그 장을 수업할 때 이 책을 반드시 함께 읽도록 지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혹은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여 해당 장에 수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행정 체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랑시에르를 선호하는 장관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무지한 스승의 방법에 따라 교육을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지능의 평등과 지적 해방에 관한 학설을 가르친다면, 그런 사회에서 형성되는 인간들은 지금 우리가 이 사회에서 흔히 보는 인간들과 어딘가 다르지 않을까?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가 개인의 의식을 일정 부분 결정하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을 해방된 주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자의 생각과는 달리 공교육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진보적인 법과 제도를 만드는 데에는 꼭 다수의 해방된 주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많은 진보적인 제도들은 소수의 계몽된 선구자들이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일단 위로부터 사회에 반강제적으로 부과된 뒤, 사후 정당화되고는 했다. 그렇게 비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제도가 나중에는 마치 그 사회의 일반의지의 표현인 것처럼 간주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의무 교육 제도라는 것도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의무 교육의 도입은 『공산당선언』의 요구들 중 하나였다. 의무 교육이 꼭 아동 노동을 막는 소극적인 역할만 한다고 볼 수는 없다. 지식 전달도 학교의 본질적인 역할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가 그 이상의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혹은 해야만 한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는데, 이를 내 식대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학교는 평등의 이념을 객관화하는 곳이다. 계몽주의가 주장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관념은 사실 자연적인 인간에게 낯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루소에 반대하여, 불평등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고, 불평등을 교정하는 것은 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학교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평등의 이념을 배울 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을 통해 그 이념에 따라 살도록 강요당한다. 교실에 앉아 있을 때, 각각의 학생은 자신이 다른 학생에 비해 조금도 특별한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한다. 사회가 교사에게 위임한 권위는 이런 평등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복무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현실의, 특히 한국의 공교육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듯이 공교육의 이념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 때문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이런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자극한다는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일 것이다.
이 모든 이론적, 실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민이 자신의 역량을 확인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저자에게 완전히 동의한다. 우리는 더 많은 해방된 주체들을 원한다. 저자가 말하는 지적으로 해방된 주체와, 계몽주의가 말하는 계몽된 인간은 의외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라는 것,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는 것, 이것이 계몽주의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점점 더 반계몽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발효된 FTA를 비롯한 각종 주요한 정치 문제에 있어서, 지배 계급의 논리는 언제나 이 문제는 정치 논리로 접근하지 말고 전문가의 판단에 맡기라는 것이다. 경제는 경제 전문가에게, 안보는 안보 전문가에게, 환경은 환경 전문가에게, 등등. 이런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에게 남은 일은 모든 문제를 해당 분야의 문가에게 맡기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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